갑자기 나타난 '사슴' 눈보다 위험한 '시럽'... 실험실 밖 실전 테스트의 세계
돌발 장애물을 피하는 상황을 가정한 무스 테스트 가상 이미지. 차체 균형과 전자식 안정화 제어(ESC)의 개입 타이밍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실전형 안전 시험이다.(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신차 한 대가 세상에 등장하기까지 제조사는 충돌, 제동, 내구 등 규격화된 시험을 수천 번 반복한다. 그러나 이런 ‘규격화한 테스트’만으로는 실제 도로에서 벌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없다.
그래서 자동차 개발 과정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소 엉뚱하게 보일 수 있는 실전형 테스트들이 존재한다. 이 시험들은 법규나 규제에 대응하는 것보다 일상에서 진짜 위기 상황에 처한 자동차가 운전자를 얼마나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지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엘크(Elk) 테스트로도 불리는 ‘무스(Moose) 테스트’다. 스웨덴에서 도로에 뛰어드는 순록과 사슴을 피하는 상황을 재현한 회피 기동 시험으로 일정 속도로 달리던 차가 장애물을 피한 뒤 다시 차선으로 복귀할 때의 자세 변화를 확인한다. 이 시험은 세련된 수치나 제원보다 차체의 균형과 전자제어 로직의 완성도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1997년 메르세데스 벤츠 1세대 A 클래스가 이 테스트에서 전복된 사건은 지금도 업계에서 회자된다. 당시 벤츠는 작은 차에도 ‘프리미엄’이라는 인식을 심으려 했지만 회피 기동 과정에서 급격히 하중이 이동하며 차체 중심이 무너져 전복되고 말았다.
이 사고 이후 벤츠는 서스펜션, 타이어, ESC 개입 로직을 대대적으로 수정했고 결과적으로 전자식 차체 안정화 장치(ESP)의 기본 장착이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무스 테스트 하나가 자동차 기술의 방향을 바꾼 셈이다. 도요타 라브4, 지프 랭글러 등도 무스 테스트에서 여러 문제가 노출된 이후 개선된 제품을 내 놓기도 했다.
반대로 성공한 사례도 있다. 테슬라 모델 3와 기아 EV6는 유럽 전문 매체들의 회피 시험에서 높은 진입 속도에서도 차체 흔들림 억제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배터리를 바닥에 배치한 전기차 특유의 낮은 무게중심이 발휘된 결과다. 전기차가 내연기관 대비 ‘실제 거동’에서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점성이 높은 저마찰 노면에서 타이어 그립과 차체 제어 로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하는 가상의 시럽 테스트 장면. 실제 빗길·눈길과 유사한 변수 환경에서 안전성과 접지력을 검증한다.(오토헤럴드 DB)
무스 테스트가 위험 회피 능력을 평가한다면 ‘시럽 테스트(Sticky Surface Test)’는 예측하기 어려운 노면에서의 제어 능력을 시험한다. 북유럽과 캐나다 일부 지역 매체와 타이어 개발사가 활용하는 방식으로 도로에 점성이 높은 액체를 얇게 뿌린 뒤 차량이 가속·제동·코너링을 반복한다.
눈길과 빙판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시럽 노면은 부분적으로 그립이 생겼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운전자 보조 시스템과 타이어 패턴, 서스펜션 응답 전략이 그대로 드러난다.
재미있는 것은 일부 제조사가 이 시험을 의도적으로 숨기려 했던 적이 있다는 점이다. 과거 특정 브랜드의 오프로드 SUV는 시럽 테스트에서 언더스티어가 심하게 발생해 차량이 제어 불능에 가까운 상황에 빠지는 영상이 공개되자 "시험은 비공식적이며 실제 도로를 반영하지 않는다"라고 대응했다.
그러나 소비자 반응은 달랐다. “바로 그런 비정상 상황에서 차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진짜 아닌가?”라는 공감대를 얻었다. 이후 이 브랜드는 서스펜션 스트로크와 ESC 개입 타이밍을 조정해 다음 연식에 반영했다. 공식 시험은 아니었지만 비표준 테스트가 실제 개선을 끌어낸 전형적인 사례다.
이 외에도 자동차 제조사는 상식 너머의 시험을 통해 실사용 안전성을 확보한다. 도심 전기차의 ‘배터리 열 적응 테스트’, 사막 지대의 ‘먼지 침투 시험’, 깊은 물 웅덩이를 건너는 ‘도하(워딩) 테스트’, 실내 온도를 80°C에 가까운 조건에서 수시간 유지하는 ‘캐빈 오더(냄새) 테스트’ 등이 그것이다.
운전자 입장에서는 눈에 띄지 않지만, 이 모든 과정은 결국 한 가지 목적에 닿는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차가 얼마나 운전자를 지킬 수 있는가다. 표준 시험으로는 평가되지 않는 이 별별 테스트들은 그래서 자동차 개발 과정에서 드러난 ‘보이지 않는 진실’에 가깝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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