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추가 변한다, 현대 ST1의 이베코 진출
우리 나라 자동차 산업의 중요한 이정표 하나가 터졌다. 지난 달 독일 하노버에서 개최되었던 국제 상용차 모터쇼 IAA 2024에서 출시된 이베코(IVECO)의 이무비(eMoovy)다.
사실 이 모델은 현대 ST1의 이베코 버젼이다. 실제로 생산도 우리 나라에서 ST1과 함께 이루어진다. 이베코는 유럽으로 수출된 이무비를 시장에 알맞게 특장 작업을 마친 뒤 자사의 판매 네트워크를 통하여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뱃지 엔지니어링이다. 거의 같은 모델이 다른 브랜드의 이름으로 출시되는 경우를 뜻하는 뱃지 엔지니어링은 이전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 나라 자동차 산업의 초장기에는 국내에서 판매되던 거의 모든 모델들이 뱃지 엔지니어링을 통하여 국내에서 조립 혹은 생산된 모델들이었다. 현재 한국지엠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통하여 판매되었던 모델들은 독일 오펠 – 일본 이스스 – 미국 GM의 모델들을 바탕으로 한 모델들이었으며, 현대자동차의 모델들은 영국 포드와 일본 미쓰비시, KGM의 뿌리 가운데 하나인 신진자동차는 토요타 모델, 그리고 기아자동차는 마쯔다 모델들을 중심으로 미국 포드(세이블), 이태리 피아트(132) 등을 생산 혹은 조립하여 국내 시장에 판매했었다.
포니 이전에는 고유 모델이 없었으면서도 자동차 수입이 강력하게 제한되었던 당시로서는 뱃지 엔지니어링 만이 내수 시장에 자동차를 공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자동차 산업이 서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 등의 선진국들의 또렷한 주도권을 쥐던 시대에는 다른 나라에는 수입 혹은 뱃지 엔지니어링 만이 자동차를 공급할 수 있는 유이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로 뱃지 엔지니어링의 양상이 변했다. 우리 나라처럼 독자 모델을 가지면서 빠르게 발전한 나라도 있지만 중국과 남미 등 제3세계의 자동차 산업이 새롭게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선진국 자동차 기업의 현지 자회사 혹은 선진국 자동차 기업과 현지 기업과의 합작사였다. 제3세계 현지 독자 모델보다는 선진국 시장의 구형 모델을 제3세계에서 생산, 판매하는 형식이 효율적이었다. 독일 폭스바겐의 2세대 파사트가 중국에서 오랜 수명을 누렸던 폭스바겐 산타나가 대표적 예다.
21세기 들어 대두된 뱃지 엔지니어링의 세 번째 흐름은 역할 분담형이었다. 대표적 예가 한국지엠에서 생산하여 세계로 수출하는 쉐보레 트랙스와 같은 사례다. 즉, 전 세계에서 생산 거점을 갖고 있는 글로벌 브랜드가 각 생산 거점별로 강점을 갖는 모델을 분담하여 생산하는 형식을 취한다. 브랜드와 모델명은 시장 상황에 따라 같을 수도, 아니면 다를 수도 있다. 이전에는 독자적이었던 브랜드들이 얼라이언스 혹은 합병의 형태로 한 가족이 된 경우가 많은 요즘의 자동차 OEM들의 이합집산도 역할 분담형 뱃지 엔지니어링의 중요한 원인이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뱃지 엔지니어링의 흐름이 흐트러지는 새로운 조류가 있었다. 바로 플랫폼 전략이다. 즉, 같은 플랫폼을 바탕으로 다양한 모델들을 생산할 수 있는 유연한 플랫폼의 등장이 단순히 내외장 일부만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 최대치였던 뱃지 엔지니어링의 외연을 극적으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더우기 핵심 모듈 이외에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유연성을 보장하는 모듈형 플랫폼은 더 이상 뱃지 엔지니어링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모델 변신의 자유로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이번에 현대 ST1이 거의 그대로 이베코 이무브로 이름만 달라진 전형적인 뱃지 엔지니어링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번째는 미래차 전환기의 ‘대마불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신기술 개발과 새로운 생산 기법의 적용 등으로 미래차로의 전환은 막대한 투자를 요구한다. 이런 막대한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기존 레거시 OEM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라는 예측이다. 특히 상용차 브랜드들은 상황이 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 이유는 승용차와는 달리 체급의 격차 때문에 플랫폼의 유연성을 이용하여 소형부터 대형까지 라인업을 채우기 어렵고 사용 환경에 따른 까다롭고 다양한 친환경 파워트레인 선택지를 모두 개발, 제공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상용차 브랜드들은 고객사의 운행 조건에 맞춰 차량과 파워트레인, 유지-관리 및 충전 인프라까지 맞춤 제공하는 컨설팅 서비스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극소수의 대형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모든 솔루션을 제공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현대 상용차와 이베코의 연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전 세계 상용차 시장을 주도하는 메르세데스 벤츠, 볼보, 트라톤(스카니아 + MAN) 등의 세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유럽의 이베코와 극동의 현대차가 상용차 시장에서 상호 협력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번 이베코 이무브는 현대 ST1 완성차를 이베코의 상표로 공급하는 것이므로 가장 직설적인 뱃지 엔지니어링의 사례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현대차는 이번 이무브 이전에 이미 이베코와 협력한 사례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2022년부터 시작된 수소 연료전지 트럭과 버스의 개발이다. 즉, 현대차는 친환경 파워트레인 기술에서 갖고 있는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하여 친환경 상용차 시장에서 자신의 지분을 견고하게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가 완제품과 파워트레인 모듈을 동시에 공급하는 실적을 보였다는 점이 두번째 시사점이다. 그것은 이른바 ‘OEM의 티어(tier) 시장 진출’이다. 지금까지는 유럽 자동차 산업이 견고하게 구축한 OEM – 티어 시스템, 즉 체계 통합과 대 고객 접점을 담당하는 자동차 제작사(OEM)과 부품 및 모듈을 공급하는 티어, 즉 부품사의 시스템으로 자동차 산업이 구성되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 구분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 대표적 이유는 두 가지. 첫번째는 현대차가 현대모비스로부터 전부 인수한 수소 연료전기 기술처럼 OEM이 핵심 모듈을 직접 개발-생산하여 공급하는 티어의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소프트웨어다. OEM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소프트웨어 영역이 부품 모듈과 어떻게 결합되는가, 그리고 티어 2의 영역이었던 하위 모듈도 소프트웨어 통합을 위하여 OEM과 직접 협업하는 등의 다양한 공급 체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번 현대차와 이베코의 협력은 현대차가 새로운 사업 영역에 첫 선을 보이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친환경 파워트레인 공급자인 티어 1으로서, 친환경 SDV인 ST1을 완제품으로 공급하면서 소프트웨어와 친환경 파워트레인, 플랫폼 공급을 통하여 OEM과 티어 0.5로서의 면모가 바로 그것이다.
현대차의 미래 사업 영역은 이제 시작되었다. 그 시작이 뱃지 엔지니어링이라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다.
글 / 나윤석 (자동차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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