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기니 브랜드 소개
- 소재지
- 이탈리아 산타가타 볼로냐
- 모기업
- Volkswagen AG
- 판매사
- SQDA 모터스
- 창립일
- 1963.10.30.
- 창립자
-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 슬로건
- Always different
- 대표업종
- 자동차 제조업
람보르기니는 폭스바겐 산하 아우디의 자회사로서, 이탈리아 볼로냐를 거점으로 하는 스포츠카 전문 제조업체로, 정식명칭은 Automobili Lamborghini S.p.A.이다. 창립자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인 1946년 농업 기계회사를 설립하여 디젤엔진 트랙터를 생산하여 큰 수익을 얻었으며, 이후 가스히터와 에어컨디셔닝 시스템 제작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꿈꿔왔던 알파로미오, 마세라티, 메르세데스 벤츠, 페라리 같은 고급 자동차를 소유하면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키우다가, 직접 스포츠카 제작 시장에 뛰어들기로 결심하였다. ?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페라리의 클러치 결함을 알리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거나, 엔초 페라리에게 “트랙터나 만들어라.”라고 들은 말에 격분한 람보르기니가 스포츠카 제작을 위해 람보르기니를 창업했다는 내용은 실제로 확인할 수 없는 설이다. 오히려, 업계의 후발주자인 람보르기니가 슈퍼카 시장에서 명성을 떨치던 페라리와 라이벌 관계를 생성하는 마케팅 차원에서 이러한 일화를 만들어 냈다는 주장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 1962년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볼로냐 인근에 공장을 건설하고, 이듬해 ‘오토모빌리 람보르기니’를 설립했다.
196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람보르기니는 지오트 비자리니가 설계한 12기통 3500cc DOHC엔진을 장착한 350GT를 공개하여 뜨거운 반응을 받았고 후속 모델 400GT까지 잇따라 성공시켰다. 1966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된 미우라는 V12 4000cc엔진을 탑재하였고 제로백이 6.2초, 최고속도 시속 280km로 당시 세계 최고속도를 기록한 스포츠카였다. 미우라는 로드용 스포츠카 최초로 미드쉽이라는 엔진 배치 방식을 채택하였고, 공개부터 큰 인기를 나타내어 1970년에는 누적 400대 판매를 돌파했다. 미우라의 인기로 회사 설립 후 최초로 이익을 남기기 시작했으나,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에게는 시련이 찾아왔다. 병행하던 트랙터 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에도 불구하고 대량의 주문이 취소되면서 큰 자금을 잃었으며, 결국 1972년 이탈리아 트랙터회사 Same에 트랙터 공장을 매각하게 되었다. 트랙터 회사 매각 후, 사업에 흥미를 잃기 시작해 람보르기니의 지분 51%를 스위스 사업가 조르주 앙리 로세티에게 매도했고, 1973년 오일쇼크와 경제불황이 닥치자 나머지 49%의 지분도 르네 라이머에게 넘긴 후 은퇴했다.
1974년 람보르기니 미우라의 후속으로 람보르기니 쿤타치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쿤타치는 직선을 강조한 디자인과 시저스 도어의 도입, 최고시속 300km/h의 뛰어난 성능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람보르기니 전통 디자인의 효시가 되었다. 쿤타치의 성공적인 시장 진입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에 의해 람보르기니는 1978년 파산하였고 1980년부터 스위스의 밈람 형제가 경영을 총괄하였다. 밈람 형제는 1984년 람보르기니를 인수하였고 ‘치타’와 ‘’잘파’를 출시하였다. 람보르기니의 회생을 이끈 밈람 형제는 람보르기니의 성장을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한 상황을 인지하고, 1987년 크라이슬러에 람보르기니를 넘겼다. 크라이슬러 산하에서 람보르기니는 1990년, 492마력의 12기통엔진을 장착한 슈퍼카 디아블로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모회사 크라이슬러의 재정난에 따라 1994년 인도네시아 부호 토미 수하르토가 이끄는 투자자 그룹에 매각이 되었고, 이 토미 수하르토 역시 90년대 후반 경제위기로 디아블로 후속모델 개발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98년 8월 아우디에 람보르기니를 매각하였다. 아우디 체제 ? 넓게 보면 폭스바겐 산하 ? 에서 람보르기니는 2001년 무르시엘라고, 2002년 가야르도를 잇따라 성공시키며 제2의 성장기에 들어섰다.
람보르기니의 엠블럼은 ‘Fighting bull’이라고 불리는 황소로 창업자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의 별자리인 황소자리를 본 떠 만들었다. 람보르기니의 모델명도 쿤타치를 제외하고는 모두 황소의 이름이거나 황소와 연관된 이름을 상용하고 있다. 참고로, 쿤타치는 이탈리아의 감탄사에서 기원한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꿈꿔왔던 알파로미오, 마세라티, 메르세데스 벤츠, 페라리 같은 고급 자동차를 소유하면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키우다가, 직접 스포츠카 제작 시장에 뛰어들기로 결심하였다. ?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페라리의 클러치 결함을 알리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거나, 엔초 페라리에게 “트랙터나 만들어라.”라고 들은 말에 격분한 람보르기니가 스포츠카 제작을 위해 람보르기니를 창업했다는 내용은 실제로 확인할 수 없는 설이다. 오히려, 업계의 후발주자인 람보르기니가 슈퍼카 시장에서 명성을 떨치던 페라리와 라이벌 관계를 생성하는 마케팅 차원에서 이러한 일화를 만들어 냈다는 주장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 1962년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볼로냐 인근에 공장을 건설하고, 이듬해 ‘오토모빌리 람보르기니’를 설립했다.
196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람보르기니는 지오트 비자리니가 설계한 12기통 3500cc DOHC엔진을 장착한 350GT를 공개하여 뜨거운 반응을 받았고 후속 모델 400GT까지 잇따라 성공시켰다. 1966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된 미우라는 V12 4000cc엔진을 탑재하였고 제로백이 6.2초, 최고속도 시속 280km로 당시 세계 최고속도를 기록한 스포츠카였다. 미우라는 로드용 스포츠카 최초로 미드쉽이라는 엔진 배치 방식을 채택하였고, 공개부터 큰 인기를 나타내어 1970년에는 누적 400대 판매를 돌파했다. 미우라의 인기로 회사 설립 후 최초로 이익을 남기기 시작했으나,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에게는 시련이 찾아왔다. 병행하던 트랙터 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에도 불구하고 대량의 주문이 취소되면서 큰 자금을 잃었으며, 결국 1972년 이탈리아 트랙터회사 Same에 트랙터 공장을 매각하게 되었다. 트랙터 회사 매각 후, 사업에 흥미를 잃기 시작해 람보르기니의 지분 51%를 스위스 사업가 조르주 앙리 로세티에게 매도했고, 1973년 오일쇼크와 경제불황이 닥치자 나머지 49%의 지분도 르네 라이머에게 넘긴 후 은퇴했다.
1974년 람보르기니 미우라의 후속으로 람보르기니 쿤타치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쿤타치는 직선을 강조한 디자인과 시저스 도어의 도입, 최고시속 300km/h의 뛰어난 성능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람보르기니 전통 디자인의 효시가 되었다. 쿤타치의 성공적인 시장 진입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에 의해 람보르기니는 1978년 파산하였고 1980년부터 스위스의 밈람 형제가 경영을 총괄하였다. 밈람 형제는 1984년 람보르기니를 인수하였고 ‘치타’와 ‘’잘파’를 출시하였다. 람보르기니의 회생을 이끈 밈람 형제는 람보르기니의 성장을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한 상황을 인지하고, 1987년 크라이슬러에 람보르기니를 넘겼다. 크라이슬러 산하에서 람보르기니는 1990년, 492마력의 12기통엔진을 장착한 슈퍼카 디아블로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모회사 크라이슬러의 재정난에 따라 1994년 인도네시아 부호 토미 수하르토가 이끄는 투자자 그룹에 매각이 되었고, 이 토미 수하르토 역시 90년대 후반 경제위기로 디아블로 후속모델 개발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98년 8월 아우디에 람보르기니를 매각하였다. 아우디 체제 ? 넓게 보면 폭스바겐 산하 ? 에서 람보르기니는 2001년 무르시엘라고, 2002년 가야르도를 잇따라 성공시키며 제2의 성장기에 들어섰다.
람보르기니의 엠블럼은 ‘Fighting bull’이라고 불리는 황소로 창업자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의 별자리인 황소자리를 본 떠 만들었다. 람보르기니의 모델명도 쿤타치를 제외하고는 모두 황소의 이름이거나 황소와 연관된 이름을 상용하고 있다. 참고로, 쿤타치는 이탈리아의 감탄사에서 기원한다.
람보르기니 판매중인 신차
- 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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